플레인바닐라(Plain-Vanilla). 평범함, 꾸밈없는 기본형을 뜻하는 관용어구다. 은행업권에 적용하면 '복잡하지 않은 단순한 계약조건의 금융상품'이라는 의미다. 주택담보대출, 신용카드와 오토론, 급전·생활비대출 등이 이른바 플레인바닐라 상품이다. 사실상 은행 대부분의 금융상품이자 막대한 이익의 주된 공급원이다.
이달 29일을 끝으로 5대 은행(KB국민·신한·하나·우리·NH농협)의 올해 3분기(7~9월) 실적발표가 마무리됐다. 고금리 잔존 효과 덕분에 이번 분기에도 호황을 누린 이들은 정부 눈치를 보느라 '역대급 순익 달성' 대신 금리인하로 인한 '이익 감소 전망'에 무게를 싣고 있다. 다만 미소까지는 감추지 못했다. "고새 얼굴이 왜이리 좋아졌냐"는 기자의 물음에 한 5대 은행 관계자는 "실적이 잘 나와 마음이 편해서 그런 것 같다"며 웃어 보였다.
5대 은행에 속하지 않은 다른 은행들도 이번 성적으로 웃을 수 있을까. 아니, 호실적 홍보에 '애써' 힘을 뺄 수 있을까. 현재 국내엔 시중·지방은행과 국책은행, 인터넷전문은행을 포함해 19개 은행이 있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9월 말 기준 예금은행의 가계대출 잔액은 1135.7조원이다. 상위 5개 은행의 가계대출 잔액은 731.1조원으로 대출 시장 점유율이 64.4%에 달한다. 금리 인하 효과가 본격 나타난다 해도 5대 은행은 상대적으로 웃을 날이 많을 것이란 얘기다.
이는 과점 구조라는 방증이다. 시간이 흘러 앱 하나만으로 구동되는 인터넷은행도 등장했지만 5대 은행 독과점 체제는 오히려 공고해졌다. 이른바 '조상제한서'(조흥·상업·제일·한일·서울은행) 시절에도 지금처럼 독과점 현상이 심하지 않았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외환위기 전 상위 4개 은행의 대출 시장 점유율은 50%를 밑돌았다. 20년이 흐른 현재는 50%를 훌쩍 웃돈다. 조상제한서가 지나간 자리를 '국신하우농'이 더 견고하게 꿰찼다는 뜻이다. 과점 구조가 지나치게 커지면 병폐가 생긴다.
제4인터넷은행 등 신규 플레이어가 시장에 들어와야 한다는 얘기를 하려는 게 아니다. '톱(Top) 5=왕관'이라 비유한다면, 5대 은행이 그에 걸맞은 '무게'를 지고 있는지 묻고 싶다. 과점 구조가 더 강력해지는 동안 이들 은행이 천편일률적인 영업 행태에서 벗어나 차별화했는지, 금융상품의 시곗바늘을 과거에 머물도록 하는 '무(無) 경쟁' '단순화'를 탈피하기 위해 얼마나 발버둥 쳤는지 묻고 싶다.
플레인바닐라는 2009년 미국 오바마 정부가 추진한 금융정책 중 하나다. 당시 금융상품의 단순화 정책을 탐탁지 않아 한 그룹은 놀랍게도 금융회사들이었다. 이들은 "'단순함'은 소비자들의 선택권을 제한하거나 개별 소비자 입장에서 더 나은 제품을 접할 수 있는 기회를 차단하는 장벽을 만들 것"이라 주장했다. 그리고 "플레인바닐라로 인해 금융사의 상품은 서민을 위한 '단순함'과 부자를 위한 '혁신' 이분법적으로 나눠질 것"이라 경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