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TV=권지현 기자] "자산과 이익 규모에서 많은 격차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KB보다 인터넷전문은행이 시장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윤종규 KB금융그룹 회장)
"기존 금융사들 역시 디지털 전환을 서두르고 있지만 인터넷은행과 빅테크 계열 금융사들의 새로운 시도가 시장의 변화를 주도하고 있다" (조용병 신한금융그룹 회장)
새해 벽두부터 국내 대형 금융그룹과 빅테크(대형 정보기술기업)간 '전쟁'의 서막이 올랐다. 과거에는 빅테크사들이 기존 정통 금융업에 도전장을 내미는 격이었다면 이제는 주요 금융그룹이 빅테크를 향해 '이대로 물러설 수 없다'는 의지를 드러내고 있다.
그동안 주요 금융그룹들은 '덩치'의 차이를 감안해 빅테크 금융사는 물론 인터넷은행을 '진정한' 경쟁자로 인식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 빅테크사들은 '1cm의 영토'로 불리는 모바일 애플리케이션(앱) 하나로 고객을 무섭게 흡수하고 있다. 금융그룹 회장들이 빅테크와의 전쟁을 선포한 것도 '고객 이탈'에 대한 두려움이 반영된 결과로 풀이된다.
금융그룹 한 관계자는 "최근 인터넷은행으로 고객이 몰리는 현상을 보면 '대마불사'라는 말은 옛말이 돼버린 것 같다"면서 "이젠 빅테크사들도 경쟁 '링' 위에 함께 올라섰다"고 말했다.
4일 금융권에 따르면 윤종규 KB금융그룹 회장은 3일 신년사 서두에서 "인터넷전문은행이 시장에서 KB보다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면서 "시장의 냉정한 평가에 대해 겸허하게 받아들인다"고 말했다. 이어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금융플랫폼 기업으로서 KB가 얼마나 가치 있고, 잘 준비된 조직인지 증명해 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윤 회장의 이번 발언을 두고 은행권에서는 금융그룹들이 처한 '씁쓸하지만 직면해야 하는 과제'를 여실히 드러낸 것이란 평가가 나온다. KB금융은 작년 3분기 기준 자산총계 650.5조원, 누적 당기순이익 3조7722억원을 기록했다. 국내 금융그룹 최고 수준이다. 반면 카카오뱅크는 총자산 35.5조원, 당기순이익 1679억원으로 자산규모는 KB금융의 18분의 1, 당기순이익은 22분의 1에 해당한다. 한마디로 '비교가 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러나 기준을 '성장률'로 바꾸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KB금융은 은행·증권·보험·카드·캐피탈 등 13개 자회사로 650조원이 넘는 자산을 운용한 결과 작년 3분기 순익이 전년 동기(2조8779억원)보다 31.1% 증가했다. 반면 카카오뱅크는 '뱅크' 하나로 전년 같은 기간(859억원)보다 순익이 95.6% 급등했다. 국내 최고 금융그룹 회장이 설립 만 6년이 채 되지 않은 인터넷은행을 직접 언급한 이유다.
신한·하나·우리 등 다른 대형 금융그룹 회장들의 생각 역시 윤 회장과 같다. 김정태 하나금융 회장은 지난 3일 "작년 기업공개에 성공한 카카오뱅크의 시가총액은 한때 45조원, 카카오페이는 33조원에 육박했다"며 "우리는 종합금융그룹으로서 훨씬 많은 자산을 보유하고 더 많은 이익을 내고 있음에도 시가총액이 두 회사의 5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하는 냉혹한 평가를 받고 있다"고 말했다. 손태승 우리금융 회장은 같은 날 "직원들도 현장에서 직접 체감하겠지만 빅테크나 인터넷은행들은 금융플랫폼으로서 기존의 금융시장까지 빠르게 잠식하고 있다"고 현실을 진단했다.
회장들이 말하는 빅테크와의 전쟁 키워드는 '플랫폼' 강화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전례 없던 '옴니채널'이라는 용어를 사용, 온-오프라인의 경계를 허물어 고객에게 새로운 경험을 제공한다는 전략이다. '영업점'으로 대표되는 오프라인 채널은 인터넷은행과 빅테크 금융사가 가질 수 없는, 시중은행이 소비자와 직접 얼굴을 맞댈 수 있는 고유한 창구이기도 하다.
슈퍼앱을 통한 플랫폼 경쟁력 향상도 예고했다. KB금융은 작년 10월 선보인 KB스타뱅킹을 기존 은행 차원에서 그룹의 금융 서비스 차원으로 끌어올린다는 방침이며, 신한금융은 올해 그룹의 앱 전반을 '바르게, 빠르게, 다르게' 운영할 계획이다. 하나금융은 아예 마이데이터 전용 앱 '하나합'을 만들었으며, 우리금융은 디지털 역량이 부족한 우리금융캐피탈·우리종합금융·우리금융저축은행 등을 대상으로 교육에 나섰다.
한 시중은행 영업점 관계자는 "지난달 영업점 내에서도 상대적으로 인터넷은행과 거리가 있는 PB(프라이빗뱅커)인 나에게까지 '카카오뱅크와 차별화되는 경쟁 방안을 가져오라'는 지시가 떨어져 당황했다"면서 "시중은행들이 이제는 정말 인터넷은행과의 전쟁을 피할 수 없다는 현실을 절감한 순간이었다"고 전했다.
다른 금융그룹 관계자는 "금융위원회가 2015년 인터넷전문은행 도입을 발표하며 당시 '메기 효과'를 거론했는데 이제는 인터넷은행이 메기를 넘어 대세가 됐다"면서 "무엇보다 편리함의 가치를 소비자들이 먼저 체감하는 만큼 금융그룹이 플랫폼 실력을 보여주지 않으면 경쟁에서 도태될 수밖에 없는 시대가 됐다"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