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TV=박원일 기자] 최근 법원이 ‘책임준공’ 의무를 다하지 못한 신한자산신탁에 대해 원리금 전액 배상 판결을 잇따라 내리면서 신탁업계에 긴장감이 고조되고 있다. 조합과 토지주에게 ‘안전장치’로 통하던 책임준공형 토지신탁이 오히려 신탁사 재무건전성을 흔드는 ‘리스크’가 됐다는 우려가 확산되고 있다.
‘책임준공확약’은 시공사가 천재지변·전쟁 등 불가항력적 상황이 발생하지 않는 한 정해진 기간 내 공사를 완료하고 미이행 시에는 시행사 채무를 인수하겠다는 약속을 말한다. 보통 신용이나 담보가 부족한 PF 사업 시행사가 PF 대출을 일으킬 때 신용보강 방식으로 사용된다.
‘책임준공신탁’(책임준공형 토지신탁)은 신탁사가 시공사의 준공을 보증하는 것이다. 시공사가 앞선 책임준공확약을 이행하지 못하는 경우 신탁사가 이를 대신 이행하는 것으로 시공사 신용마저 부실한 PF 사업장에 신탁사가 재차 신용을 보강하는 구조다.
![책임준공형 토지신탁 구조도(일부 조정) [사진 신한자산신탁]](http://www.fetv.co.kr/data/photos/20250939/art_17586981387005_83aa4f.jpg?iqs=0.6631567977547698)
토지주나 조합 입장에서는 안정성을 확보할 수 있는 장치지만 반대로 신탁사는 시공 지연이나 원자재 가격 상승, 미분양 증가와 같은 모든 사업 리스크를 떠안게 된다. 최근 금리 인상과 부동산 경기 침체가 맞물리면서 그 부담이 현실화되고 있는 것이다.
최근 신탁업계에 따르면 지난 8월 신탁사의 책임준공 미이행에 따른 손해배상 책임을 인정하는 법원 판결이 나왔다. 안성 물류센터 관련 책임준공 소송에서 법원이 신한자산신탁에 대출 원리금 전액을 배상하라고 판결한 것이다.
이번 판결은 지난 5월 평택 물류센터 사건 판결에 이어 책임준공형 신탁 구조에서 신탁사의 배상 책임을 명시적으로 인정한 두 번째 사례다. 업계에서는 연이어 원고 전부승소 판결이 나오면서 향후 유사 소송에서 신탁사에 불리한 해석이 자리잡을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이처럼 시공사의 준공 지연에 대해 신탁사가 실질적으로 보증기관 역할을 하면서 손실이 고스란히 재무제표에 반영되는 구조가 만들어진 셈이다.
업계 전반의 경영 지표도 악화일로다. 주요 부동산신탁사들의 2분기 실적을 보면 상당수가 순손실로 돌아섰다. 부채비율 역시 평균 100%를 넘어섰고 일부 신탁사는 신규 사업 수주 경쟁에서 ‘출혈 수주’ 논란까지 빚고 있다. 이 같은 상황에서 책임준공 부담은 소송 관련 우발부채 부담이 커져 자칫 신탁사의 존립 기반까지 위협할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합과 토지주는 여전히 책임준공형 신탁을 선호한다. 금융조달의 안정성을 확보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다만 최근의 판결과 실적 악화로 인해 신탁사들은 신규 계약 조건을 한층 보수적으로 검토하는 분위기다. 전문가들은 “지금처럼 신탁사가 모든 리스크를 떠안는 구조는 장기적으로 지속가능하지 않다”며 “계약구조 재설계와 제도적 개선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일각에서는 신탁사들이 사업 다각화와 리스크 관리 강화에 나서야 한다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단순 책임준공 모델에서 벗어나 리츠(REITs)·펀드 등 자산운용형 상품으로 무게중심을 옮기거나 디벨로퍼 역할을 줄이고 관리·자문 기능을 강화하는 방향이 대안으로 거론된다. 동시에 금융기관과의 협력 구조를 재정비해 위험 분담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는 제언도 나온다.
감독당국 역시 상황을 예의주시하고 있다. 금감원은 지난 12일 부동산신탁사 13개사 재무·내부통제 담당 임원을 대상으로 간담회를 개최해 책임준공신탁 리스크 관리 강화를 위한 선제적인 충당금 적립을 강조했다.
아울러 책임준공 기일이 도과한 사업장에 대해서는 소송 제기 등에 대비해 충당금을 보수적으로 적립해 리스크 관리를 강화할 필요가 있다고도 강조했다. 책임준공 사업장의 대규모 손실이 금융권 전반으로 번질 경우 또 다른 시스템 리스크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가 깔려 있다.
책임준공형 토지신탁은 오랫동안 국내 개발사업에서 신뢰를 쌓아온 핵심 제도였다. 그러나 시장 환경 변화와 법적 판례는 신탁사에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다. ‘안전판’이던 제도가 오히려 새로운 ‘리스크’로 작용하는 지금, 신탁업계의 전략적 전환이 불가피해 보인다.
신한자산신탁 관계자는 “이번 판결 전부터 책임준공신탁은 더 이상 취급하지 않고 있다”며 “차입형 토지신탁을 포함해 전체 사업 포트폴리오를 재조정 중”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