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TV=권지현 기자] 우리은행이 밀린 이자를 갚으면 해당 금액만큼 원금을 깎아 주겠다고 선언했다. 취약 차주들의 금융비용 부담을 덜어줘 '상생 금융'을 실천하겠다는 취지다.
하지만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이자를 꼬박 내온 차주들이 차별을 당할 수 있고, '이자를 연체해도 원금 탕감'이라는 모럴헤저드(도덕적 해이)를 불러올 수 있어 벌써부터 '얕은 수'라는 지적이 나온다.
5일 금융권에 따르면 우리은행은 이자를 연체 중인 고객이 밀린 이자를 납부하면 해당 금액만큼 원금을 줄여주기로 했다. 대출금을 전액 상환한 경우에는 납부한 밀린 이자를 다시 돌려준다. 이른바 '상생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시행 기간은 이달부터 내년 6월 30일까지 1년간이다.
예를 들어 대출원금이 1000만원이고 정상적인 이자와 연체된 이자가 각각 70만원, 30만원일 경우 차주가 이번 달에 밀린 이자 30만원을 갚게 되면 다음 달 원금을 1000만원에서 30만원 줄어든 970만원으로 적용하는 식이다. 만일 차주가 이달에 원금은 물론 정상 이자와 연체이자까지 포함한 총 원리금 1100만원을 한 번에 갚으면 밀렸던 이자 30만원은 다음 달 본인 계좌로 입금해 준다.
대상에는 제한이 없다. 대출 종류는 한도대출(마이너스 통장)과 정책자금대출, 주택기금대출 등 일부 대출을 제외한 모든 원화 대출이며, 차주는 개인, 자영업자, 법인을 가리지 않는다. 연 소득, 신용점수 등도 따지지 않으며, 지원 한도와 횟수도 무제한이다. 이 때문에 이자가 밀린 차주가 연 수억원을 벌어들여도 일단 연체이자를 내기만 하면 해당 금액만큼 몇 번이고 원금을 탕감 받을 수 있다.
연체이자와 원금을 직접적으로 연관 지은 은행권 첫 사례로, 금융권 전체에서도 전례를 찾기 힘들다. '연체금'의 경우 KB국민은행이 지난 2월 17일부터 취약 차주에 대해 연체이자율을 1%포인트(p) 깎아주고 있고, 최근 새마을금고가 건전성 관리를 위해 올해 말까지 밀린 이자와 정상적인 이자 모두 감면해주기로 했다,
이마저도 새마을금고는 최근 논란이 일자 급히 수습에 나섰다. 국민은행과 신한은행은 연체금과 직결된 상생 금융 방안에 대해 "현재 검토 중인 사안이 없다"고 밝혔다.
우리은행의 이번 방안을 두고 '묻지도 따지지도 않은' 퍼주기 정책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정상적으로 이자를 갚아온 사람들과의 형평성 논란이 일 수 있는 데다, '이자가 밀려도 도리어 원금을 깎아주더라'는 도덕적 해이마저 불러일으킬 수 있다. 여기에 원화대출금과 연체 이자액이 줄어 은행 수익성에 악영향을 미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현재 우리은행의 연체 대출 규모는 약 5600억원으로, 연 3% 지연이자율을 적용해 밀린 이자에 대해서만 매년 168억원가량 수익이 난다.
A 대형 은행 관계자는 "시중은행이 밀린 이자를 내면 원금을 깎아주는 정책을 내는 것은 매우 이례적"이라며 "이미 수많은 차주들이 이자유예를 적용받고 있고 최대 60개월간 분할 상환을 할 수 있는 제도가 있는데도, '형평성 논란'과 '모럴헤저드'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이번 대책을 내놓은 이유가 무엇인지 잘 납득이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우리은행보다 더 많은 대출 연체액을 보유한 다른 대형 은행들이 이 같은 정책을 내놓지 않은 이유가 있지 않겠느냐"고 덧붙였다.
일각에선 회장과 은행장이 잇달아 바뀐 우리금융그룹이 정부와 당국 기조에 발맞추려다 보니 설익은 대책을 급하게 내놓은 것 아니냐는 지적도 나온다. 지난 3월 취임한 금융위원장 출신의 임종룡 우리금융 회장은 정부-당국-금융사 간 '합'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는 인물이다. 그간 우리은행은 행장 교체 과정에 있어 이렇다 할 상생 방안을 내놓지 않았다. 하지만 3일 조병규 신임 행장이 취임하자 바로 다음날인 4일 이번 방안을 발표했다 .
B 대형 은행 관계자는 "사실상 정부와 금융당국에 대한 '5600억원 생색내기'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며 "윤석열 정부 이후 금융당국이 지속적으로 '상생 금융'을 강조하고 있는데, 관(官) 출신의 회장과 신임 행장의 조합이라는 점에서 이번 방안은 당국이 좋아할 만한 '코드 정책'을 낸 것이란 생각마저 든다"고 말했다.
논란에 대해 우리은행은 상생 금융에 대한 실천 의지라는 점을 강조했다.
우리은행 상생금융부 관계자는 이번 방안 결정 과정에 대해 "당국이 먼저 제안해 온 것은 아니고, 내부적으로 검토해 결정한 사안"이라고 말했다.
이어 성실히 이자를 내고 있는 차주들과의 형평성 지적과 수익성 악화 우려에 대해서는 "연체가 없는 차주들에 대해 차별이 있을 수 있지만,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자'는 취지로 이번 정책을 마련했다"면서 "수익성에도 타격이 있지만 벌어들인 혜택을 돌려주는 일환으로 생각하고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