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TV=김현호 기자]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12일 국정농단 파기환송심 재판으로 가석방된지 한달을 맞는다. 취업제한 부담에 공식적인 행보는 위축된 상태지만 삼성은 대규모 투자계획을 발표하는 등 총수 공백에서 벗어난 모습이다. 최근 인텔이 잇따른 ‘반도체 청사진’을 쏟아내면서 업계에 ‘견제구’를 쏟아내는 가운데 삼성전자도 구체적인 투자를 집행할지 관심이 모아진다.
◆‘자유의 몸’ 됐지만...취업제한 부담은 여전=출소 이후 이재용 부회장은 조심스러운 경영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가석방 당시, 삼성전자 서초 사옥을 방문해 주요 경영진으로부터 관련 업무를 보고 받은 것으로 알려졌고 대외활동은 삼성 준법감시위원회의 위원으로 활동한 고(故) 고계현 소비자주권시민회의 사무총장의 빈소를 찾은 것이 전부다. 가석방으로 자유의 몸이 됐지만 취업제한을 적용받고 있는 만큼 경영활동에 제약이 따른 것으로 보인다.
특정경제범죄 가중 처벌법상 이 부회장은 5년간 취업을 제한받는다. 다만, 삼성전자내 공식 직함이 없고 4년째 무보수 경영을 이어온 만큼 관련법이 적용되지 않는다는 해석도 나온다. 실제 최태원 SK그룹 회장과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은 횡령 등의 혐의로 실형을 선고받고도 각각 무보수와 대표이사직에서 사임했다는 이유로 총수 역할을 해온 바 있다.
경제개혁연대 등 시민단체는 이와관련, “총수로써 회사에 끼치는 영향력을 고려해 미등기임원이라도 관련법을 적용받아야 한다”고 비판하고 있다. 반면, 박범계 법무부 장관은 이 부회장의 경영행보에 대해 “주식회사는 이사회와 주주총회를 통해 최종 의사결정을 하는데 이 부회장은 미등기 임원이라 이사회 의사결정에 참여할 수 없다”며 “이런 요소를 고려하면 취업이라고 보긴 어렵다”고 말했다.
◆반도체 패권전쟁 속...인텔, 대규모 투자 잇따라 쏟아내=총수 공백에 경영활동이 위축됐던 삼성은 이 부회장이 가석방된 지 11일 만인 지난달 24일, 240조원의 투자계획을 발표하며 ‘투자 시계’를 빠르게 돌리고 있다. 특히 반도체와 관련해선 비상 상황을 거론하며 ‘생존 전략’이라고 덧붙였다. 미국과 중국, 유럽연합(EU) 등 세계 각국이 대규모 투자 계획을 잇따라 쏟아내면서 반도체 패권 경쟁이 본격화됐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세계 최대 반도체 종합기업인 인텔이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올해 ‘구원투수’로 투입된 팻 겔싱어 인텔 CEO(최고경영자)는 무너진 반도체 왕조를 새롭게 구축하기 위해 잇따른 청사진을 밝힌 상태다. 지난 3월에는 200억달러(약 22조7000억원)를 투자해 미국 애리조나주에 파운드리(위탁생산) 공장 건립을 발표했고 최근에는 세계 4위 파운드리 기업인 글로벌파운드리 인수 추진도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겔싱어의 공격적인 행보는 차랑용 반도체까지 확장됐다. 그는 이달 7일(현지시간), 세계 최대 모터쇼 IAA(독일국제자동차전시회)에 나와 “유럽에 800억유로(약 110조6408억원)를 투자해 최소 2개의 반도체 공장을 짓겠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자동차의 미래는 EV(전기차), AV(자율주행차)에 달려 반도체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며 “자동차 원가에서 반도체가 차지하는 비중이 치솟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시장조사업체 옴디아에 따르면 전체 반도체 시장에서 차지하는 차량용 반도체 시장규모는 지난 2013년, 250억 달러 수준에 그쳤지만 연평균 10%씩 성장해 2026년에는 676억 달러까지 확대될 것으로 예상된다. 글로벌 완성차업계는 자동차에 첨단기술을 확대 적용하고 있으며 전기차에 쓰이는 차량용 반도체는 기존 내연기관차 대비 2배 이상 필요하고 자율주행차는 10배 가까이 늘어나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인텔이 잇따라 대규모 투자를 추진하고 있는 이유는 파운드리 1,2위 기업인 TSMC와 삼성전자를 견제하기 위한 전략으로 풀이된다. 차량용 반도체는 마진이 낮은 탓에 양사의 팹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높지 않지만 파운드리 점유율 확대 측면에서 매력적인 부품으로 분류된다. 이 반도체는 독일의 인피니언과 네덜란드의 NXP, 일본의 르네사스 등이 생산하고 있는데 이들 기업은 대부분 1992년도에 처음 사용되기 시작한 8인치 웨이퍼를 주요 재료로 사용하고 있다.
현재 TSMC와 삼성전자가 3나노 공정을 앞두고 있는 반면, 8인치 웨이퍼는 주로 90~180나노 공정이 적용된다. 반도체는 회로가 미세하면 전력과 성능이 향상되지만 차량용 반도체는 구식 웨이퍼를 주요 재료로 사용하는 만큼 고효율의 제품으로 생산되기 어렵다. 반도체 시장 조사기관 IC인사이트에 따르면 유럽은 전체 반도체 생산량 가운데 8인치 생산비중이 58%에 달해 주요국 가운데 가장 높다. 인텔이 미세공정 난이도를 높인다면 유럽의 물량을 흡수할 가능성이 높아질 수 있는 이유다.
박종선 유진투자증권 연구원은 “이미 레벨2 자율주행차 보급이 시작됐고 점차 레벨이 업그레이드된 자율주행차 보급이 확대될 것으로 보여 차량용 반도체 수요는 급증할 것으로 예상한다”고 분석했다. 그러면서 “자율주행차 반도체 탑재량은 기존 내연기관차(약 300개)에 비해 7배에 가까운 2000여 개가 탑재될 것으로 예상돼 이러한 수치를 감안하면 현재 캐파(Capa) 대비 큰 폭의 투자가 진행되어야 할 것으로 예상한다”고 했다.
◆삼성, 투자속도 빨라질까=삼성전자의 투자속도는 이재용 부회장 출소 이후 앞당겨지고 있는 분위기다. 지난 8일(현지시간), 미국 현지 방송에 따르면 텍사스주 테일러시는 삼성의 파운드리 공장을 현지에 유치하기 위해 재산세 환급 등 세제 혜택을 부여하는 방안을 승인했다. 이에 따라 삼성은 2026년 1월까지 약 55만7418m² 규모의 반도체 공장을 건설할 수 있게 됐다. 삼성의 투자금액은 약 20조원으로 알려졌다.
재계에서는 미국 파운드리 공장 투자계획을 마무리 짓기 위해 이 부회장이 이달 추석에 출장길에 오를 것이란 전망했다. 이 부회장은 지난해 설 연휴, 브라질 현지법인을 둘러보고 추석에는 극자외선(EUV)을 생산하는 네덜란드 ASML을 방문하는 등 명절 때마다 현장 출장을 이어왔다. 하지만 올해에는 취업제한 부담에 국내에 머무르는 것으로 전해졌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미국 출장은 결정된 게 없다”고 말했다.
삼성이 테일러시에 투자를 확정하면 한미 정상회담 당시 미국에 약속한 반도체 투자계획을 발표한지 5개월여 만에 이뤄지게 된다. 이와 관련해 삼성 측은 “여러 지역과 투자 관련 내용을 논의하고 있지만 구체적으로 결정된 것은 없다”고 전했다. 반도체에 대한 글로벌 수요가 갈수록 확대되고 있는 가운데 이 부회장 출소 이후 투자집행이 현실화될지 주목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