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TV=나연지 기자] 지난해 삼성전자의 주요 벤더들은 혹독한 시간을 보냈다. 메모리 업황 둔화와 설비투자 축소로 장비·소재 기업들의 실적이 줄줄이 꺾였다. 그러나 올해 들어 판이 달라졌다.
HBM(고대역폭메모리) 전환이 본격화되며 반도체 산업의 중심축이 ‘속도’에서 ‘완성도’로 옮겨갔기 때문이다.
HBM 공정은 적층·레이저·식각·테스트 전 과정이 맞물려야 수율이 확보된다. 이 복잡한 밸류체인 속에서 한미반도체, 이오테크닉스, 솔브레인, 두산테스나, 하나마이크론, 하나머티리얼즈, 티씨케이 등 국내 벤더들은 각자의 기술 영역에서 핵심 축을 담당한다.
한미반도체의 하이브리드 본더가 적층 정밀도를 높이고, 이오테크닉스의 레이저 리페어 기술이 수율을 안정화한다. 솔브레인·하나머티리얼즈·티씨케이의 케미컬·세라믹 부품이 공정 균일성을 뒷받침하고, 두산테스나와 하나마이크론은 테스트·패키징을 통해 제품 신뢰도를 완성한다.
삼성전자도 이들을 단순한 납품사로 보지 않는다. DS(반도체) 부문은 매년 ‘상생협력 Day’를 열고 1·2·3차 협력사를 대상으로 상생펀드·공정개선 지원사업·기술컨설팅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또한 별도의 ESG 펀드를 조성해 협력사의 환경·안전·지속가능경영(ESG) 투자를 지원하고, 안전·품질·에너지 관리 교육을 병행하고 있다.
이런 제도적 장치는 단순한 사회공헌을 넘어, 협력사의 생산성과 기술력을 강화하는 간접 투자 구조로 기능한다. 업계에서는 “삼성전자의 협력사 프로그램이 기술·경영·ESG를 통합 지원하는 방식으로 발전하면서, 공급망 전체의 체질을 바꾸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그 결과 지난해 부진했던 벤더들의 실적은 올해 일제히 반등했다. HBM4 전환기 속에서 장비·소재·후공정 전 분야의 수익성이 회복됐고, 밸류체인 전체의 현금흐름도 개선됐다.
삼성전자의 CAPEX 회복이 직접적인 요인이지만, 협력사 지원과 기술 파트너십 강화가 ‘지속 가능한 성장 구조’로 작동했다는 점은 분명하다.
HBM 시대의 경쟁력은 누가 더 빨리 만드는가보다, 누가 더 정밀하게 함께 움직이는가에 달려 있다. 삼성전자의 경쟁력은 공장 크기가 아니라 벤더들과의 신뢰망의 밀도에서 결정된다. ‘10만전자의 엔진들’은 그런 관계의 산물이다. 삼성전자의 기술력은 단일 기업의 힘이 아니라, 수백 개 협력사의 혁신이 맞물려 돌아가는 공생의 구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