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FETV=권지현 기자] 내부 출신이 맡았던 NH농협금융지주 회장직에 기획재정부 출신 전직 관료인 이석준 전 국무조정실장이 낙점되면서 금융권에 '윤석열 대통령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우고 있다.
관치(官治).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정부가 시장에 개입하는 것'인 이 단어가 '비경제적 의도로 민간 부문의 인사에 개입하는 것'을 뜻하는 '협의의 관치' 행태로 금융권에 번지고 있다. 정권이 바뀌자 잇달아 금융당국, 금융사 수장으로 줄줄이 내려온 인사들은 모두 '尹(윤) 라인'으로 집약된다.
◆ 다시 튀어나온 '후보 시절' 인연
12일 NH농협금융 차기 회장으로 선정된 이석준 전 국무조정실장은 윤석열 대통령이 후보 시절 사실상 인재 1호로 영입했던 인물이다. 금융위원회 상임위원, 기재부 제2차관, 국무조정실장 등을 지냈다. 이 전 실장은 서울대 경제학과 78학번, 윤 대통령은 법학과 79학번으로 이 전 실장이 한 학번 선배다. 윤 대통령과 대학 시절부터 막역한 사이로, 윤 대통령은 그를 사석에서 "석준이 형"이라 부른다고 알려졌다. 이 전 실장은 윤 대통령의 대선 캠프 좌장을 맡아 경제공약 전반을 총괄했으며, 당선인 특별고문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지난 6월 취임한 강석훈 KDB산업은행 회장도 윤 대통령 후보 시절과 인연이 깊다. 대통령 선거 과정에서 후보정무실장직을 맡아 윤 대통령을 가까이에서 보좌했다. 강 회장도 윤 대통령이 경제공약을 만들 당시 상당 부분 힘을 보탰다.
이 밖에 유재훈 예금보험공사 사장은 윤 대통령 후보 대선 캠프에서 금융 자문에 깊숙이 관여한 인물이며, 역대 금융감독원장 중 가장 적극적으로 정부 입장을 대변한다는 평가를 받는 이복현 금감원장은 검찰 내에선 '윤석열 사단의 막내'로 통한다.
◆ 흡사 '점령군', 충암고·서울대 라인

금융권에 포진한 윤 라인의 또 다른 교집합은 '학연'이다. 그야말로 '서울대 전성시대'라는 말이 나올 정도다. 지난달 선임된 허창언 보험개발원장은 윤 대통령의 서울대 법대 79학번 동기다. 한국은행과 금감원, 금융보안원에서 근무했다. 특히 허 원장은 2011년 이후 약 4년간 금감원에서 보험 업무를 한 것을 제외하고는 보험업과는 거리가 있다는 평을 받았으나 관련 기관 수장에 낙점됐다.
앞서 7월 취임한 윤희성 수출입은행장은 서울대 경제학과 출신으로, 윤 대통령과는 사법시험 중 알게 된 사이다. 이외 한은 이창용 총재와 금융위원회 김주현 위원장, 김소영 부위원장도 새 정부 출범 후 관직을 맡은 서울대 출신 인사들이다.
차기 금융투자협회장 최종 후보자 세 명 중 한 명인 서명석 전 유안타증권 사장은 윤 대통령이 나온 충암고 출신이다. '충여회'(충암고 출신 여의도 기업인 모임) 회원으로도 알려졌다. 충여회는 지난 2005년 증권사, 자산운용사 등 여의도에서 근무하는 충암고 출신 인사 50여 명으로 시작했다. 이기흥 신한라이프 부사장, 조재민 신한자산운용 사장, 김군호 에프앤가이드 대표 등도 충암고를 나왔다.
금융지주 한 관계자는 "잘만 활용하면 얼마든지 사회에 선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학연이 유독 정치인과 결합하면 본받기 힘든 선례를 남긴 경우를 숱하게 봐왔다"면서 "이번 정권 들어서는 초기부터 '윤 대통령-서울대' 공통분모를 가진 인사들이 금융사 CEO로 줄줄이 내려오는데, 이게 관치금융 행태가 노골화되고 있다는 뜻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 돌고 돌아 다시 '관료'

윤 대통령과 정부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을 관료 출신 노익장들이 금융기관 수장으로 속속 복귀하면서 '또 모피아'라는 말이 나온다. 모피아는 옛 재무부(MOF)와 마피아(Mafia)의 합성어다.
내년 1월 2일 임기가 끝나는 윤종원 IBK기업은행장의 후임으로 기재부 관료를 지낸 정은보 전 금감원장이 유력하게 거론되고 있다. 기업은행은 정부 지분이 3분의 2 가량인 국책은행으로, 기업은행장은 별도의 공모나 임원추천위원회 구성없이 금융위원장이 제청하면 대통령이 임명한다.
우리금융지주와 BNK금융지주의 차기 회장직엔 각각 임종룡 전 금융위원장, 김석동 전 금융위원장과 김창록 전 산업은행 회장이 오르내리고 있다. 특히 BNK금융의 경우 국민연금 지분을 제외하고 정부가 직접 지분을 보유한 것이 없는 민간 금융사임에도 경제관료 출신들이 하마평에 오르고 있다.
이외 정완규 여신금융협회장(행시 34회), 유재훈 예금보험공사 사장(행시 26회), 이종백 NH농협금융지주 이사회 의장(사시 17회) 등도 윤 정부 출범 후 금융지주와 금융 공기업, 협회에 둥지를 튼 퇴직 관료들이다.
대형은행 한 관계자는 "금융 올드보이들이 윤 대통령 취임 후 다시 '환생'한 만큼 정부와 대통령에 충성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며 "이는 금융사가 주주, 고객, 시장 상황을 제대로 따라가지 못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한쪽에선 금융권 세대교체가 이뤄지고 있는데, 이와 배치되는 전직 관료들의 귀환을 어떻게 바라보고 적응해야 할지 고민"이라고 덧붙였다.
한편 전국금융산업노동조합은 NH농협금융 차기 회장으로 이석준 전 국무조정실장이 낙점된 12일, "윤석열 대통령은 낙하산 인사를 개선하고자 인수위 시절 공무원 중 젊고 유능한 인재 최우선 선발, 낙하산과 청탁 인사 금지 등을 주문했던 것으로 밝혀진 바 있다"며 "그러나 대통령의 철학과 다르게 금융권 낙하산이 연이어 거론되고 있는데, 이는 법에 의한 공정이 아니라 법을 이용한 불공정"이라고 일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