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TV=권지현 기자] 옛 장기신용은행(이하 장은) 출신들이 금융권 곳곳에서 활약을 이어가고 있다.
엘리트 금융의 상징인 장은은 장기신용채권을 발행하고 장기자금 대출을 주로 하는 은행으로, 1980년 세워졌다. 높은 연봉, 미국식 근무 분위기로 1980년대 후반 이후 명문대 졸업생들에게 선망의 직장이었다. 하지만 출범 18년 만인 1998년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때 국민은행으로 흡수 합병됐다. 인원이 10배가 넘는 국민은행에 인수합병되면서 장은은 덩치가 급격히 쪼그라들었다. 1100여명에 이르던 장은 행원들 중 절반 이상인 600여명이 이 시기 짐을 쌌다.
둥지를 떠난 장은 출신들은 이후 은행과 증권, 제2금융권, 벤처업계 등에 새 보금자리를 만들며 건재함을 드러냈다. 때마침 불기 시작한 주식투자붐과 벤처붐도 이직에 큰 도움이 됐다. 이후 이들은 '장은동우회'(옛 장우회, 장은누리)를 통해 20년 넘게 끈끈한 소통을 이어가고 있다. 현재 등록된 회원은 약 1000여명으로 추산된다. 장은동우회 홈페이지에는 '본 홈페이지는 1967년 한국개발금융로 설립되고 1980년 은행으로 전환돼 한국 금융산업 발전에 일조한 한국장기신용은행에 근무했던 임직원들의 친목 및 상호 커뮤니케이션을 위해 만들어졌으며, 한국장기신용은행에 근무했던 임직원분들만 회원으로 가입해 이용할 수 있습니다'라는 문구가 쓰여져 있다.
1998년 국민은행으로의 흡수 이래 장은 출신으로 존재감을 드러낸 대표적인 인물은 허인 KB금융지주 부회장이다. 합병 당시 소수 정예에 자율성과 재량권을 중요시하던 장은과 인력이 많고 소매금융을 전문으로 하던 국민은행 간 문화적 차이 극복 여부가 금융권 큰 이슈였던 점을 감안하면 장은 출신으로서 KB금융 최고위직군까지 오른 허 부회장은 그야말로 독보적이다.
1988년 장은에 입사한 허 부회장은 국민은행에 새 둥지를 튼 지 25년 만인 2013년, 국민은행에서 임원(여신심사본부 상무)을 달았다. 2000년 당시 국민은행(계열사 포함)에서 명맥을 이어가던 장은 인력은 450명에 달했으나 이 시기에는 그 수가 급감, 열 손가락으로 세기에 힘들지 않은 인원이 남아있던 터였다. 2017년 국민은행장에 올랐던 허 부회장은 만 4년을 꼬박 재임한 뒤 올 1월 부회장(개인고객부문장, WM·연금부문장, SME부문장)에 올랐다. 장은 출신으로 자리에 남아 지주 최고경영자(CEO) 직군에 오른 최초 사례다. 우상현 국민은행 CIB고객그룹 부행장 겸 KB증권 IB부문 부사장도 장은 출신이다.

키움증권은 장은 출신들의 합작품이다. 2000년 1월 국내 첫 온라인 종합증권사로 출범할 당시 '키움닷컴증권'이던 키움증권은 당시 금융감독위원회(옛 금융위원회)에 파견 근무했던 장은 출신들이 창업을 주도했다. 지난해 12월 대표이사에 선임된 황현순 사장은 장은을 거쳐 합병 때 벤처붐을 타고 한국IBM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후 2000년 키움증권에 입사, '선배'들의 자취를 이어받았다. 당시 키움닷컴 외 미래에셋증권, 삼성증권, 마이다스자산운용(현 마이다스에셋), 미래에셋자산운용 등에도 장은 출신들이 각각 많게는 10여명 가량 진출했다. 이 밖에 이석기 교보증권 각자대표, 강선빈 NH벤처투자 대표, 김희석 하나대체투자운용 대표, 김영성 DGB금융그룹 전무, 장보성 자본시장연구원, 임기영 전 대우증권 사장 등도 장은 출신이다.
장은 인물들은 보험사 CEO도 꿰찼다. 작년 1월 KB손해보험의 수장이 된 김기환 사장은 KB금융 허 부회장과 동일하게 장은-국민은행-지주 이력을 갖고 있다. KB금융 재무총괄 부사장까지 지낸 김 대표는 지난해 처음으로 보험업계에 둥지를 틀었다. 김승호 현대해상 부사장도 장은-국민은행 커리어를 지녔다. 장은에 입행한 뒤 국민은행에서 팀장을 지낸 그는 KB자산운용에서 상무까지 달았다. 이후 현대해상으로 자리를 옮겨 자산운용부문장을 맡은 뒤 올해 1월 부사장으로 승진했다.
금융권 한 관계자는 "장은 출신은 대부분이 고급인력이었던 데다 업무 특성상 당시 보기 드문 기업금융 전문가들이었다"며 "1998년 국민은행으로의 합병 후 한국 경제가 IMF 충격에서 점차 벗어나면서 다들 일자리를 구하는 데 크게 어렵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 이어 "이러한 환경들이 이들이 현재까지도 금융권 곳곳에서 고위직으로 명맥을 이어갈 수 있었던 뿌리가 됐다"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