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TV=김주영 기자] “제가 할 수 있는 건 없어요. 안타까울 뿐이죠.”
한 바이오기업 연구원의 얼굴에 그늘이 드리운다. 이 말은 단순한 체념이 아니다. 몇 년 혹은 수십 년을 연구실에 바친 끝에 들려온 한 통의 소식 '임상 실패', 그 무게는 숫자로 환산되지 않는다.
바이오 산업은 느리다. 신약 하나 개발하는 데만 기본 10년이 걸린다. 전임상부터 시작해 1상, 2상, 3상까지. 각 단계마다 수많은 실험과 인내가 필요하다. 그 오랜 시간에도 성공 확률은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글로벌 기준으로 임상 3상까지 통과해 신약으로 출시되는 비율은 10%를 밑돈다. 결국 대부분의 후보물질은 수면 아래로 가라앉는다.
기업 입장에서는 막대한 시간과 비용을 들인 파이프라인이 임상에서 실패하면 곧바로 재무적 손실로 이어진다. 주가 하락은 물론 후속 투자 유치에도 타격을 입는다.
브릿지바이오는 지난 4월 14일 장 마감 후 특발성 폐섬유증 치료제 ‘BBT-877’의 임상 2상에서 유의미한 개선 효과를 확인하지 못했다고 밝혔다. 시장 반응은 차가웠다. 발표 당시 8960원이던 주가는 5거래일 연속 하한가를 기록했고 4월 16일에는 680원까지 떨어졌다. 불과 며칠 만에 시가총액이 10분의 1도 안 되는 수준으로 줄어든 셈이다. 증권가는 곧바로 목표주가를 하향 조정했고 “기술이전 협상에도 부정적인 영향이 불가피하다”는 분석이 뒤따랐다.
최근 HLB테라퓨틱스는 신경영양성각막염(NK) 치료제 ‘RGN-259’의 유럽 임상 3상에서 통계적으로 유의미한 결과를 확보하지 못했다. 이에 따라 주가는 이틀 연속 급락하며 52주 신저가를 경신했다. HLB테라퓨틱스는 투약군에서 완치 환자가 다수 나왔다고 해명했지만 위약군에서 예상 이상의 플라시보 효과가 관찰되며 1차 평가지표에서 유의미한 차이를 보이지 못한 점이 발목을 잡았다. 주식시장 반응은 냉정했다. 기대감이 빠진 자리를 실망감이 채웠고 숫자는 하락 곡선을 그렸다.
회사가 체감하는 숫자와 달리 연구원에게 임상 실패는 조금 다르게 다가온다. 마치 오랜 시간 정성껏 키운 자식이 취업에 실패한 것처럼 느껴진다.
ABL바이오의 정진원 이학박사는 “약 하나를 발굴해 임상 진입까지 가는 데만 몇 년이 걸린다”며 “그렇게 손에서 놓은 과제가 실패했다는 소식을 들으면, 이미 다 큰 자식이 취업을 못한 걸 보는 부모의 마음이 된다”고 말했다. 그는 “기술이전이 돼도 그 뒤는 나의 손을 떠난 일이기 때문에 직접 관여는 못 하지만 애틋함은 남는다”고 덧붙였다. 그는 “내가 2012년부터 관여했던 물질이 지금 미국에서 2상, 3상 진행 중인데, 이미 손을 뗀 지 오래라서 이제는 마치 예전에 지도했던 학생이 프로 무대에 진출한 걸 지켜보는 기분”이라고도 말했다.
연구의 시작은 치열했지만 결과는 예측할 수 없다. 그럼에도 연구원은 “단 한 명의 환자라도 있다면 우리는 시작할 이유가 충분하다”며 다시 책상 앞에 앉는다.